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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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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 유물출토 (면목동)

구섯기 유출출토 (면목동)

1967년 면목지구 택지조성공사 중 정지된 주택지에서 상당히 마모된 돌망치가 채집되면서 광범위한 조사를 한 결과 양지바른 산기슭의 표토가 많이 유실된 세 곳에서 많은 거정석영맥암(巨晶石英脈岩) 석기들이 발견되었다. 출토된 지층은 적갈색의 점토층으로 연대를 추정할 수 없으며, 화석이나 토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유적지는 약 100㎡에 걸쳐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이미 채집된 석기와 석편이 모두 112개에 달하며 석기들은 찍개, 돌망치, 뾰족개, 긁개 등으로 비교적 많이 사용되었던 유물들이다.
유적의 입지적 조건은 뒤에 산을 등지고 앞이 트였으며 중랑천이 이루어 놓은 들이 눈 앞에 펼쳐 있어서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캠프사이트(Campsite)로 아주 좋은 조건을 구비하였으며, 유적에서는 타제석기만 출토되었는데 채집된 석기는 대부분이 몸돌석기이며 몇 개의 큰 격지석기도 끼어있다.
이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은 경희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조사된 서울시 유일의 구석기시대의 유적으로 지금 현재 서울역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경동제일교회

경동제일교회

1904년 감리교 선교사 한운설(G.G.Hounsell)과 한국인 최성렬이 창립한 중랑구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적 명소로 중화동 92-1번지에 소재한다.

능행로

  • 조선시대 왕들이 선왕들이 능을 돌보기 위해 행차했던 길로 크게 두 갈래로 나누어 진다.
    • 동대문 → 동묘(신설동) → 보재원(안암동) → 종암동 입구 → 월곡동길→ 화랑로 → 망우동(양원리) →옛 망우리 고개  (중앙선 망우리터널) → 동구릉

능말 경주임씨 집성촌

능말 경주임씨 집성촌

조선시대 역대 왕들이 동구릉으로 행차하던 길목에 있던 능마을에는 경주 임씨(林氏) 약20여호가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윈래 경주에 살다 임진왜란 이후 현재의 신내동에 이주 정착하여 300여년 된 집성촌이다. 아울러 능말에 거주한 경주임씨의 문중묘가 있다.
그리고 능말의 신내동 98번지와 105번지에는 전통가옥이 남아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있으며 교지, 문건, 우마차, 여물통, 옹기 등 생활사 자료가 보존되어있다. 또한 동구릉으로 넘어가는 길 좌측 양지바른 곳에는 내관으로서 수양대군에게 내응한 공로로 2등공신에 오른 전균부부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
1989년 지금의 위치로 이장되었으며 비석2기와 석상1기, 문관석 2기가 있다.

말목장

진헌마정색도

아차산을 주봉으로 하여 그 서쪽 기슭에 조선시대 국립 목장격인 살곶이 목장이 있었다. 1788~1802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조선 사복시에서 만든 살곶이 목장 지도에 의하면 그 둘레는 약 20km에 이르는데, 여러 문헌기록에는 30~40리에 이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살곶이 목장의 구체적인 경계를 살펴보면 동쪽 경계는 아차산 줄기가 되고 서쪽 경계는 오늘날의 배봉산으로부터 한양대학교가 자리잡고 있는 구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된다. 북쪽 경계는 오늘날의 월릉교 근처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중랑포 아래쪽에서 냇물과 벌판을 가로질러 면목리 위쪽에 아차산 줄기까지 이어지는 선이었다. 이 경계는 명종 이전에는 목책을 세운 토성이었다가 그 이후에는 석성으로 개축되었다. 1633년(현종4년)에 허목이 쓴 한성목장지도 중 [진헌마정색도(進獻馬正色圖)]에 살곶이 목장이 나와있다.
이 지도에서 살곶이 목장은 세종 때와 연산군 때 일시 폐지되었다가 다시 설치되었는데 목장에서는 왕이 사냥할때 필요한 말을 기르고 훈련시켰으며, 군사의 무예 검열과 왕의 사냥터로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살곶이 목장은 헌종 12년(1846년)에 익종의 능인 수릉을 천장산에서 용마봉으로 옮겨옴에 따라 폐지되었다가 철종 6년(1855년) 수릉이 동구릉으로 옮김에 따라 다시 목장으로 복구되었으나, 1904년 순종황제의 비인 순명황후를 지금의 광진구 능동 어린이 대공원 내 유강원에 안장함으로써 폐지 되었다.

망우동지(忘優洞志)

망우동지(忘優洞志)

정구의 후손이 1760년에 편찬한 책으로 규장각에 소장된 [훈도방 주자동지(薰陶坊 鑄子洞志)] 이후 최초로 발굴된 서울지역의 동지이며, 조선시대에는 지지류의 종류로 행정구역상 군·현에 대한 각종 관련기록을 정리한 邑志(관찬읍지, 사찬읍지)의 편찬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동지편찬은 상당히 드문 경우로 망우동지는 동의 내력을 포함한 자연, 경제, 문화, 사회 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동의 사정을 살필 수 있도록 기록한 책으로 현재 서울역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망우리 고개 유물출토(망우동)

현재의 망우리 고갯길을 개축하면서 고인돌, 반월형석도, 돌창, 검파두석, 돌화살촉, 빗살무늬토기, 공열토기, 구연토기, 흑도, 유구석부, 점토대토기 등이 발견되었다.

성덕사

성덕사

1957년 절이 건립된 후 주변 마을의 빈번한 불의의 사고가 없어졌다고 전해지고 있음.
1957년에 건립된 성덕사는 상봉동 303-3번지에 소재하며 대지 800여평, 건평 20평으로 인근 주민들의 복을 비는 명소이다.

숙선옹주(선빈)안씨묘

숙선옹주(선빈)안씨묘

태종의 후궁인 숙선 선빈 안씨의 묘로 현 묵1동 산 37-1번지에 소재하며 묘비와 석상, 석등이 남아 있으며, 석등은 전형적인 조선 초기 석등의 형태를 보여준다.

양원리(養源里) 동래 정씨집성촌

양원리(養源里) 동래 정씨집성촌

망우동 양원리에 있는 동래정씨 집성촌은 여말 ·선초의 인물인 정구가 정착한 이후 600년이 넘는 동족촌으로 이루어져 서울시내에 잔존하는 최고의 집성촌이다.
동래정씨 집성촌에는 지금도 정씨들이 30여호 정도 살고 있다.
양원리는 구릉산 남서쪽 망우동의 자연촌으로 조선시대 역대왕들이 태조의 건원릉에 행차할 때 지나는 마을이었다.
현재 중앙선 북쪽 넘어 송곡여자중·고등학교 뒤쪽에 있는 마을로 동래 정씨가 600년 전부터 16대에 걸쳐 모여살고 있는 집성마을이다.
양원리라는 마을이름은 조선 태조가 건원릉을 정하고 돌아오는 길에 망우리 고개를 넘다가 갈증이 생겨 이곳 우물물을 마셨는데, 물맛이 어찌나 좋은 지 이 물을 양원수(養源水)라고 이름을 붙여준 뒤부터 마을이름도 양원리라 하였다고 한다.
현재 양원리 우물은 주택이 늘어나면서 수질이 오염되어 식수로는 사용할 수 없게 되었고 우물의 자취만 남아있다.

여정루

여정루

1985년 9월 2일 상봉터미널 이용 승객들이 만남의 장소와 휴식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건립된 명소.

13도 창의군탑

13도 창의군탑

1907년 11월 동대문 밖 30리에 해당되는 망우리 일대에서 48진 1만여명에 이르는 의병이 13도 창의대군소를 설립하고 총대장에 이인영, 군사장에 허위를 추대하여 서울로 진격, 일본과 혈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퇴진하였다. 비록 서울 진격은 못했으나 항일의병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91년 7월 31일 동아일보사에서 기념탑을 망우리공원 입구에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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